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대화는 대체로 같은 모양으로 흘러갑니다. 한 사람이 후보를 말하고, 다른 사람이 그건 어제 먹었다고 하고, 다시 조용해집니다. 설거지 순서도 비슷합니다. 누가 할 차례인지 서로 기억이 다르고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결국 목소리가 큰 쪽이 아니라 먼저 지친 쪽이 합니다.
이런 자리에 뽑기를 들이면 결정은 빨라집니다. 다만 도구를 켜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원판에 무엇을 적을지 정하지 못한 상태라면 원판은 그냥 빈 원입니다. 이 글의 중심은 도구가 아니라 그 원판에 들어갈 후보 목록입니다.
매일 같은 대화가 반복되는 구조
반복되는 대화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제안, 거절, 침묵입니다. 제안하는 사람은 대체로 매번 같은 사람이고, 거절은 이유가 없어도 되고, 침묵은 제안했던 사람이 다시 정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구조에서 손해를 보는 쪽은 제안한 사람입니다. 몇 번 반복되면 제안 자체를 하지 않게 되고, 그때부터는 “먹고 싶은 거 없어”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여기서 진짜 문제는 결정을 못 하는 성격이 아니라 거절의 비용입니다. 제안에는 노력이 들지만 거절에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습니다. 비용이 없는 행동은 계속 나옵니다. 뽑기는 이 불균형을 건드립니다. 후보가 확정된 뒤에는 개별 항목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단, 순서가 뒤집히면 효과가 사라집니다. 뽑고 나서 후보를 문제 삼으면 거절이 결과 단계로 옮겨온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합의는 결과가 아니라 후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무엇을 후보에 넣을지 정하는 단계가 이 방법의 거의 전부입니다.
후보 목록을 설계하는 법
후보는 다섯 개에서 여덟 개 사이가 좋습니다. 근거는 양쪽 끝에 있습니다.
세 개 이하면 뽑을 이유가 없습니다. 후보가 둘이면 둘 중 하나를 말하면 되고, 그건 대화로 정리되는 규모입니다. 도구를 여는 동작이 대화보다 오래 걸립니다.
열 개를 넘기면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칸을 채우려고 딱히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끼워 넣게 됩니다. 그 항목이 뽑히는 순간 “이건 좀”이라는 말이 나오고, 한 번 그렇게 되면 그 뒤로는 결과를 무시하는 습관이 생깁니다. 목록이 길수록 무시할 항목이 섞일 여지도 커집니다. 다섯에서 여덟이라는 범위는 대화보다 빠르고, 버릴 항목이 들어가지 않는 구간입니다.
내용을 채울 때 지킬 규칙은 세 가지입니다.
- 전원이 거부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넣습니다. “이게 나오면 나는 다른 걸 먹겠다”에 해당하는 항목은 후보가 아닙니다. 넣기 전에 한 사람씩 확인합니다. 이 확인을 한 번 해 두면 그 뒤에 나오는 모든 결과가 유효해집니다.
- 가격대를 비슷하게 맞춥니다. 후보 안에 가격 차이가 크면 결과가 곧 지출 결정이 됩니다. 그러면 결제하는 사람에게 결과를 거부할 이유가 생깁니다. 비싼 후보는 목록을 따로 만들어 특별한 날에만 씁니다.
- 한 달에 한 번 갱신합니다. 계절과 입맛이 바뀌고 문 닫는 가게도 생깁니다. 갱신 날짜를 정해 두면 “이 목록 이제 안 맞아”라는 말이 갱신일까지 미뤄집니다. 그 사이에는 목록이 유지됩니다.
목록이 완성되면 원판돌리기에 넣고, 다음에 또 쓸 목록은 기록/저장에 프리셋으로 남깁니다. 매번 새로 입력하면 그 자리에서 항목이 바뀌고, 항목이 바뀌면 합의도 매번 다시 해야 합니다. 목록을 고정해 두는 것이 이 방법의 핵심 장치입니다.
7일 실험 기록
후보 목록을 만들어 두고 일주일 동안 어떻게 되는지 적어 봤습니다. 특별한 규칙 없이 정한 것과 쓴 도구, 그날 눈에 띈 점만 기록했습니다.
| 일 | 정한 것 | 쓴 도구 | 관찰 |
|---|---|---|---|
| 1일 | 저녁 메뉴 | 원판돌리기 | 후보 여섯 개로 시작. 정하는 데 걸린 시간이 가장 짧았고 결과를 보고 웃고 넘어갔다. |
| 2일 | 설거지 | 주사위게임 | 짝수와 홀수를 각자에게 배정해 한 번 던졌다. 던지는 동작이 있어 미루는 말이 없었다. |
| 3일 | 저녁 메뉴 | 원판돌리기 | 나온 항목을 바꾸자는 말이 처음 나왔다. 목록에 동의하지 않은 항목이 있었다는 뜻이라 그 항목을 뺐다. |
| 4일 | 빨래 개기와 분리배출 | 사다리타기 | 두 가지 일을 두 사람에게 짝지었다. 순서가 아니라 짝짓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
| 5일 | 정하지 않음 | 없음 | 약속이 있어 뽑을 일이 없었다. 후보 목록은 그대로 뒀다. |
| 6일 | 대청소 구역 | 제비뽑기 | 구역 이름을 카드로 만들어 뽑았다. 화장실이 걸린 사람이 다음 주 면제를 요구했고, 그 규칙이 없어서 그 자리에서 만들었다. |
| 7일 | 저녁 메뉴 | 원판돌리기 | 목록에서 항목 하나를 뺀 뒤로는 결과를 두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
기록에서 남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결과를 두고 말이 나온 날은 목록에 동의하지 않은 항목이 들어 있던 날이었습니다. 도구를 바꿔서 해결된 게 아니라 항목을 하나 빼서 해결됐습니다. 둘째, 규칙이 없는 지점은 꼭 그 상황이 닥칠 때 드러납니다. 6일차의 면제 요구가 그렇습니다. 미리 정해 둘 수 있었던 규칙인데 미리 정해 두지 않았을 뿐입니다.
메뉴와 집안일은 성격이 다르다
둘 다 뽑기로 정하지만 구조가 다릅니다. 메뉴는 그날로 끝나는 일회성 결정입니다. 오늘 무엇이 나와도 내일은 새로 뽑습니다. 그래서 후보 중 하나를 고르는 원판돌리기가 맞습니다. 며칠 결과가 한쪽으로 몰려도 다음 날 초기화되므로 불만이 누적되지 않습니다.
집안일은 반복됩니다. 같은 일이 매일 또는 매주 돌아오고, 누가 몇 번 했는지가 기억에 쌓입니다. 여기에 매번 새로 뽑기를 돌리면 한 사람이 연달아 걸리는 구간이 반드시 생깁니다. 확률로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당하는 쪽에는 이상한 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일은 뽑기보다 순번이 낫습니다. 순번은 한 번 정해 두면 다음 차례를 계산할 필요가 없고, 건너뛴 사람이 누구인지도 드러납니다.
뽑기는 그 순번을 처음 만들 때만 씁니다. 이후에는 정해진 순서를 돌립니다. 매일 한 번씩 갈리면 되는 작은 일은 규칙 하나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설거지를 주사위게임으로 정하고 짝수와 홀수를 각자에게 배정해 두면, 이름을 입력하지 않고 한 번 던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사람이 셋 이상이면 나올 수 있는 숫자를 셋으로 나눠 배정하면 됩니다. 여러 가지 일을 여러 사람에게 한 번에 붙여야 할 때는 사다리타기가 빠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무엇을 먹을지는 원판, 반복되는 일을 누가 할지는 순번, 오늘 한 번만 갈리면 되는 일은 주사위입니다.
예외를 먼저 정하기
규칙이 깨지는 지점은 늘 예외입니다. 예외를 결과가 나온 뒤에 만들면 그것은 예외가 아니라 번복입니다. 아래 네 가지는 시작하기 전에 정해 둘 만합니다.
- 예산 상한
- 후보 목록과 별개로 한 끼 상한선을 정해 둡니다. 상한을 넘는 후보는 목록에 넣지 않습니다. 금액이 걸리면 결과를 즐기는 사람과 결제하는 사람이 갈리고, 그 순간 뽑기는 힘을 잃습니다.
- 손님이 있는 날
- 손님의 사정을 뽑기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손님이 오는 날은 뽑기를 쓰지 않기로 미리 정해 둡니다. 예외가 미리 있으면 그날 급하게 목록을 고치지 않아도 됩니다.
- 컨디션과 식단
- 아픈 사람이 있거나 식단을 조절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조건을 먼저 반영합니다. 맞지 않는 후보를 그날만 빼는 방식이 간단합니다. 후보를 빼는 것과 결과를 바꾸는 것은 다릅니다. 뽑기 전에 하면 규칙이고, 뽑은 뒤에 하면 번복입니다.
- 연속 부담 면제
- 같은 사람이 힘든 일을 연달아 맡으면 다음 차례에서 빼 줍니다. 몇 번 연속인지 숫자로 정해 두는 편이 낫습니다. 두 번 연속이면 다음은 면제 정도가 무난합니다. 이 규칙이 없으면 앞의 기록 6일차처럼 그 자리에서 협상을 시작해야 합니다.
기록을 남기면 원한이 줄어든다
“지난주에 누가 했지”는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더 잘 기억하기 때문에 양쪽 다 자기가 더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화는 기억을 대조하는 방식이라 사실 확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해결은 기록입니다. 결과 화면을 캡처해 대화방에 남기거나, 냉장고에 붙인 종이에 날짜와 이름만 적어 둡니다. 형식은 상관없고 남아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기록이 있으면 그 질문은 논쟁으로 번지지 않고 확인으로 끝납니다. 기록/저장에 결과를 남겨 두면 다음에 목록을 다시 불러 쓸 때도 편합니다.
기록에는 부수 효과가 하나 더 있습니다. 몇 주 분량이 쌓이면 실제 분담이 눈에 보입니다. 체감으로는 반반인데 기록으로는 한쪽에 몰려 있는 경우가 있고,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 확인은 뽑기와 무관하게 유용합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나눠야 하는 일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고, 명절이나 여행처럼 규모가 커지는 경우는 가족 여행과 명절 역할 나누기에 따로 적어 두었습니다.
대화방이나 메모에 그대로 쓸 문장은 아래 정도면 충분합니다.
추첨을 멈춰야 하는 신호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 상황도 있습니다. 신호는 분명합니다. 한 사람이 결과를 계속 뒤집을 때입니다.
결과가 나올 때마다 다른 이유를 대며 다시 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애초에 후보 목록에 동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도구를 바꿔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 원판에서 주사위로 옮겨도 뒤집는 사람은 뒤집습니다. 문제는 뽑기가 아니라 합의가 없다는 사실이고, 그때 필요한 것은 다시 돌리기가 아니라 목록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대화입니다.
집안일 쪽에서 나오는 신호는 조금 다릅니다. 뽑기 결과와 상관없이 특정한 일은 늘 같은 사람이 하고 있다면, 그 일은 애초에 후보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목록에 없는 노동은 뽑기로 나눠지지 않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일부터 목록에 적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뽑기로 정하지 않을 것이 있습니다. 돈이 오가는 약속, 계약, 누가 책임을 질지 정하는 문제는 뽑기 대상이 아닙니다. 결과에는 법적 효력이 없고 나중에 근거로 쓸 수도 없습니다. 금액이 걸린 자리에서 뽑기를 쓸 조건은 점심 커피 내기에 적어 두었습니다. 요약하면 액수가 작고 참여자가 모두 미리 동의한 경우에 한합니다.